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감상/책

여행의이유. 김영하.

 

독서모임에 선정돼서 읽은 책. 평소에도 에세이는 많이 읽지 않기에 자발적으로는 고르지 않았을 책이다. 사실 김영하 작가 책도 많이 안 읽어봐서... 살인자의 기억법과 오직 두 사람을 읽었는데 내 취향이 아니라 느껴서 그 뒤로는 김영하 작가 책을 굳이 찾아 읽지 않았다. 그런데 의외로 방송에 나와 말하는 김영하 작가는 매력적인 사람이었다. 생각도 못 한 지점을 찌르고 들어오는 말들에 머리가 띵하기도 했고, 내가 어렴풋하게 느꼈던 감정을 잘 정제된 말들로 풀어주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고.

 

작가의 입장에서 쓴 책이라 그런가, 공감 가지 않는 일화도 있었다.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을 때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. 두 작가 모두 직업이 특이하다보니 나는 알지 못하는 세계라 그냥 그런가 보다 하며 넘어갔던 부분들. 그래도 내 이야기 마냥 느껴지는 내용도 많았고, 여행은 무엇인가 다시 한번 곱씹어 보는 계기가 됐다. 그에 대한 내 생각을 기록해본다.

 

존중

여행은 존중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다. 문화권의 차이를 인지하고 있자면 명백한 다름을 쉽게 인정할 수밖에 없다. 그 인정하고 존중하는 경험이 나의 세상을 넓혀 준다고 생각한다. 실제로 그러기도 했고.

 

도피를 위한 호캉스

예전엔 비싼 돈 주며 호캉스를 왜 가는지 이해를 못 했었는데, 독립을 하면서 그 심리를 깨달았다. 집 안엔 해야 할 일이 널려있다. 편히 쉬고 싶어도 시선 둘 곳이 없다. 그리고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, 나의 상처를 흡수한 물건들이 너무 많다. 호텔은 기억을 인위적으로 지우는 장소라 했던가. 나도 가끔 그 표백이 간절해질 때가 있다. 호텔은 내게 말을 거는 물건이 없다. 일상생활에서는 그런 고요한 장소를 만나기 힘드니 사람들이 호캉스를 가는 게 아닐까.

 

선순환

김영하 작가는 여행지에서 겪은 호의가 돌고 돌아 자신에게 돌아오길 바란다 했다. 그게 곧 호의의 선순환이라고. 나도 그 순환에 일조해야 마땅할, 잊지 못할 경험을 한 적이 있다. 

뮌헨 시청사 앞에서 시계탑을 구경하고 있는데 금발 벽안 독일 아저씨가 뜬금없이 말을 걸어왔다. 그것도 한국어로! 그땐 2011년이라 한류 열풍이 일 때도 아니었고, 보통 한국에서 왔다면 북한이냐 남한이냐를 물을 정도로 우리나라의 인지도는 바닥이었다.

아저씨는 본인의 BMW 사원증을 보여주며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, 쉬는 날 나와 호젓하게 거닐다 여행 온 한국인이 있으면 투어를 시켜 주는 게 취미다, 엄청 예쁜 성당이 있는데 큰 길가에 있으니 의심되면 도망치기도 쉬울 거라며 거기만이라도 일단 가보자는 제안을 하셨다. 무슨 배짱인지 친구와 나는 그를 따라나섰다. 어리기도 했고, 이상하면 뛰어서 달아나자는 호기로운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. 결과적으로 그날 우리는 아주 환상적인 투어를 받았다. 한국 친구가 지어준 이름도 있었다. 김정일이라고(그 땐 김정일이 죽지 않았을 때다). 정일 아저씨는 지금도 뮌헨 시청사 앞에서 한국인들에게 투어를 제안하고 계실까?

우리나라를 찾은 여행객들이 무언가를 물어볼 때면 정일 아저씨가 생각나서 괜히 더 친절하게 답해주려 한다. 그리고 가끔 생각해본다. 나도 뜬금없는 투어를 제안해볼까? 아직 해 본 적은 없지만, 이렇게 계속 떠올리다 보면 언젠가 한 번은 시도라도 해보지 않을까.

 

 

-

 

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. 그 말은 돌아올 장소가 있다는 의미니까. 

 

여행을 하는 동안 겪는 사건사고들은 그 당시에는 힘들고 가혹하다 느껴지지만(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!), 시간이 지나면 돌아볼 만한 추억이 되고 경험으로 쌓이게 된다. 여행지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색다른 상황에 던져지는 만큼, 전혀 본 적 없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. 내가 처음 보는 사람과 말을 잘 섞는다는 것도, 생각보다 즉흥적인 행동을 잘 한다는 것도, 위기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취하는 지도 모두 여행을 하면서 알게 됐다.

 

여행은 일회성이 아니다. 돌아온 뒤 일상을 보내면서 그 경험이 더 특별해진다. 내게는 항상 그랬다. 막상 여행을 다닐 때는 뭐가 뭔지도 모르다가, 끝난 뒤 기억을 곱씹으며 의미를 깨닫게 된다. 그렇게 내 세상이 조금 더 확장된다. 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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